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엑시트>를 처음 봤을 때 저는 그냥 가벼운 여름 블록버스터 정도로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 불이 켜졌을 때, 저는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웃었는데 울고 싶었고, 시원했는데 어딘가 먹먹했습니다. 30대 후반이라는 시기가, 이 영화와 기묘하게 정확히 포개졌기 때문입니다.
철봉에 매달린 백수, 그리고 진짜 재난의 시작
영화 <엑시트 (EXIT, 2019)>의 첫 장면은 동네 놀이터입니다. 주인공 용남(조정석 분)이 아이들 사이에서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는 그냥 웃겼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볼 때는 그게 안 웃겼습니다. 저 사람, 저랑 별로 다르지 않다 싶었거든요.
용남은 취업에 실패한 30대 청년입니다. 어머니 칠순 잔치 자리에서 친척들에게 명함 하나 내밀지 못하는 그 자괴감,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게 보통 무게가 아닙니다. 이 영화가 영리한 건, 재난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용남의 일상 자체를 재난으로 설정해 놓는다는 겁니다. 취준생의 위축감과 비교 속에서 겨우 버티는 모습은, 팍팍한 현실에서 낙오되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는 청년 세대의 서글픈 외줄 타기와 정확히 겹칩니다.
잔치가 열리는 도심 연회장 '구름정원'에서 용남은 대학 시절 짝사랑이었던 의주(임윤아 분)를 다시 만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독가스 테러라는 진짜 재난이 터집니다. 현실의 재난을 살아내던 소시민이 물리적 재난까지 맞닥뜨리는 순간, 영화는 비로소 본격적인 엔진을 달고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굳게 잠긴 옥상문이 말하는 것
유독가스는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차오릅니다. 살아남으려면 위로, 더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유일한 출구인 옥상문은 굳게 잠겨 있습니다. 화재 방지나 관리 규정 때문에 걸어 잠근 문 하나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들의 발목을 잡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단순한 재난 영화의 장치가 아닙니다. 이 '잠긴 옥상문'은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의 모든 시각적 요소를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을 통해 강렬한 사회적 상징으로 기능합니다. 여기서 미장센이란 단순히 카메라 앵글이나 조명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배우의 위치, 소품, 공간 구성 전체를 아우르는 영화 언어입니다. 이 문은 "위기가 닥쳤을 때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시스템이 정작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닫혀 있다"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열쇠가 없어 당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용남은 가스 차단창을 직접 깨고 줄 하나를 붙잡은 채 외벽을 타기로 결심합니다. 조정석 배우의 떨리는 손끝과 짜내는 비명은, 어떤 거창한 영웅주의도 없이 그냥 "살고 싶다"는 원초적 본능 하나로 버티는 인간의 민낯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이 제 가슴을 세게 친 건, 저도 수십 번 그런 순간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공식적인 도움을 기대했다가 문이 닫혀 있을 때, 결국 스스로 창을 깨고 나가야 했던 그 감각.
- 수직적 공간 구성: 지상(가스의 바다, 절망)과 옥상(생존, 희망)의 대비
- 잠긴 옥상문: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를 상징하는 핵심 오브제
- 와이어 액션: 영웅이 아닌 소시민의 절박한 몸짓으로 연출
쓰레기봉투 방독복과 청춘의 가성비 생존법
<엑시트>를 보면서 가장 제 경험과 맞닿는 부분이 바로 이 장면들이었습니다. 용남과 의주는 마트용 대형 쓰레기봉투를 몸에 두르고 박스 테이프로 손목과 발목을 꽁꽁 감습니다. 고기 불판과 대형 쓰레기통을 방패 삼아 유독가스가 깔린 도심을 뚫고 달립니다. 특수 부대도 없고 첨단 장비도 없습니다. 있는 것만 끌어모아 버티는 겁니다.
이걸 단순한 코미디 장치로 읽으면 절반밖에 못 본 겁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물론 독가스는 아니지만—변변찮은 스펙과 보잘것없는 조건으로 취업 문을 두드리던 시절, 쓰레기봉투 방독복이 따로 없었습니다. 자원이 부족하고 기회가 비틀어진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도구들을 끌어모아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 이 영화는 그걸 재난 생존이라는 형식으로 유쾌하게 시각화합니다.
클라이밍(climbing), 즉 암벽 등반 기술이 결정적인 생존 도구가 된다는 설정도 같은 맥락입니다. 클라이밍이란 인공 또는 자연 암벽을 맨손 혹은 간단한 장비만으로 오르는 스포츠로, 영화에서는 '취업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며 주변의 핀잔을 받던 동아리 활동이 실제 생사를 가르는 기술이 됩니다. "쓸데없다고 구박받던 노력이 결국 당신을 구한다"는 메시지를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기가 어렵습니다. 헬기를 향해 노래방 기기 템포에 맞춰 "따 따 따, 따 따, 따, 따 따 따!" 모스 부호를 보내는 장면은 웃음과 먹먹함이 동시에 터지는 명장면입니다. 모스 부호(Morse Code)란 점과 선의 조합으로 문자를 표현하는 신호 체계로, 영화 속에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잡기'가 생존의 언어가 됩니다.
30대 후반의 남자가 "나도 살고 싶다고!"에서 멈춘 이유
용남과 의주는 옥상에 먼저 도착한 구조 헬기를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에게 양보합니다. 그리고 다시 가스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마침내 옥상에 단둘이 남겨졌을 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두 사람은 소리칩니다. "나도 살고 싶다고! 헬기 왜 안 오는 건데!"
이 대사에서 저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30대 후반이 되면 어른의 책임감이라는 이름 아래, 두렵다고 말할 자리가 점점 줄어듭니다. 직장에서 치솟는 압박, 집값이라는 독가스, 타인과의 비교라는 유독 물질. 가스는 언제나 아래에서부터 조용히 차오르고,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숨을 쉴 수 있는 높은 곳을 향해 계단을 뛰어올라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괜찮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FIC)에 따르면 <엑시트>는 2019년 개봉 당시 누적 관객 수 942만 명을 기록하며 그해 한국 영화 흥행 3위에 올랐습니다. 단순한 오락 영화가 900만 명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건, 이 영화가 건드린 감각이 특정 세대만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사구조(narrative structure) 측면에서 이 영화는 매우 정직합니다. 여기서 서사구조란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간적·인과적 흐름의 골격을 말합니다. <엑시트>는 신파 없이, 무능한 정부 비판 없이, 오직 두 소시민이 서로의 손을 잡고 "뛰자!"라고 외치는 연대의 구조 위에서 작동합니다. 그 단순함이 오히려 더 깊이 찌릅니다. 통계청 조사(출처: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당시 청년(15~29세) 체감실업률은 25%에 육박했습니다. 용남의 백수 일상이 낯설지 않았던 이유가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엑시트, 가족이랑 같이 봐도 괜찮은가요?
A. 제가 직접 부모님과 함께 봤는데 문제없었습니다. 잔인한 장면이나 선정적인 내용 없이 웃음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구성이라 10대부터 60대까지 함께 즐기기에 무리가 없습니다. 다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분이라면 와이어 액션 장면에서 살짝 힘들 수 있습니다.
Q. 엑시트가 단순한 재난 영화랑 다른 점이 뭔가요?
A. 기존 한국 재난 영화들이 국가적 위기와 영웅적 희생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엑시트>는 취준생과 연회장 부지점장이라는 평범한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세웁니다. 신파 없이 유쾌하게, 그러면서도 청년 세대의 현실을 정확하게 담아낸다는 점이 가장 큰 차별점입니다.
Q. 조정석이랑 임윤아 케미가 실제로 느껴지나요?
A.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임윤아가 걸그룹 출신이라 반신반의했는데, 실제로 보면 두 사람의 찌질하고 당찬 케미스트리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긴박한 상황에서도 티격태격하는 장면들이 영화의 리듬을 경쾌하게 살려줍니다.
Q. 클라이밍을 모르면 내용 이해가 어렵나요?
A.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클라이밍 지식이 없어도 용남과 의주가 왜 살아남을 수 있는지 영화가 충분히 자연스럽게 설명해 줍니다. 카라비너(carabiner, 산악용 잠금 고리)나 줄을 이용한 등반 장면은 맥락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결론
<엑시트>는 억지 신파 없이 시원하게 웃고, 쫄깃하게 긴장하며, 끝에 가서는 조용히 먹먹해지는 영화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영화가 가장 오래 남습니다. 화려한 CG나 거창한 메시지 없이, 대형 쓰레기봉투와 박스 테이프만으로 살아남으려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렇게 깊이 울릴 수 있다는 게 지금도 놀랍습니다.
"쓸데없다"라고 구박받던 노력이 결국 나를 구한다는 메시지,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고 뛰어가는 연대의 힘. 이 두 가지를 90분 안에 이렇게 유쾌하게 담아낸 영화를 저는 아직 이 영화 말고는 떠올리지 못합니다. 답답한 날, 억지로 위로받고 싶지 않은 날에 틀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