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질을 다룬 영화가 유쾌할 수 있을까요? 저는 처음 <도굴> 포스터를 봤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웃음과 함께 꽤 묵직한 질문 하나가 남았습니다. 지금 제가 매일 하는 이 삽질, 과연 무엇을 파내기 위한 것인가.
케이퍼 무비라는 장르, 한국에서 이렇게 터질 줄은 몰랐습니다
케이퍼 무비(Caper Movie)란 도둑이나 사기꾼 같은 인물들이 팀을 꾸려 무언가를 훔치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리는 장르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범죄 과정 자체가 오락이 되는 영화입니다. 할리우드에서는 <오션스 일레븐>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데, 저는 솔직히 이 장르가 한국 정서에 잘 맞을지 의심스러웠습니다.
박정배 감독은 그 의심을 보기 좋게 깨버립니다. <도굴>은 한국 특유의 말장난과 우리 문화재라는 소재를 엮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케이퍼 무비를 완성했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누아르(Noir)적 어둠을 의도적으로 걷어낸 연출이었습니다. 누아르란 범죄 영화에서 어둡고 비관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는 스타일인데, 이 영화는 그 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밝고 빠른 편집, 끊임없이 치고받는 대사가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이런 톤 앤 매너가 가능한 건 인물들 덕분입니다. 천재 도굴꾼 강동구(이제훈 분)는 흙 맛만 봐도 유물의 위치를 짚어내는 감각을 지녔습니다. 고분 벽화 전문가 존스 박사(조우진 분)는 자칭 "한국의 인디아나 존스"인데, 제가 보기엔 인디아나 존스보다는 허당에 가깝습니다. 거기에 삽질 하나로 전설이 된 삽다리(임원희 분)까지. 이 조합이 내뿜는 시너지가 예상 밖으로 강했습니다.
- 케이퍼 무비: 범죄 팀의 작전 과정 자체를 오락으로 만드는 장르
- 누아르 거부: 어두운 분위기 대신 경쾌한 속도감과 말장난으로 무장
- 타깃: 서울 선릉, 도심 한복판 조선시대 보물
- 핵심 캐릭터: 강동구(이제훈), 존스 박사(조우진), 삽다리(임원희)
삽질의 기술,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보이는 것들
영화를 보면서 제가 꽤 불편해진 순간이 있었습니다. 삽다리가 아무 말 없이 땅을 파는 장면입니다. 그 모습이 어딘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도 30대 후반을 보내며 비슷한 삽질을 반복해 왔다는 걸 그 장면에서 새삼 깨달았습니다.
"삽질을 한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무의미한 헛수고, 다른 하나는 묵묵하게 땅을 파내려 가는 기술. 영화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삽다리의 삽질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원하는 깊이까지 파내려 갑니다. 이건 오랜 시간의 축적이 만든 기술입니다.
출처: 영화진흥위원회(KOFIC) 자료에 따르면, <도굴>은 2020년 개봉 당시 팬데믹 상황에서도 13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코로나19로 극장 문이 절반쯤 닫힌 시기에 거둔 성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존스 박사의 방식도 저는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화려한 입담과 인맥으로 위기를 돌파합니다.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프레젠테이션 하나에 사활을 걸던 제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실력이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강동구처럼 전체 판을 읽고 팀을 조율하는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개인 기술도 묻혀버린다는 것. 이건 제 경험상 틀린 말이 아닙니다.
"도둑이 아니라 컬렉터"라고 주장하는 인물들의 자기 합리화에 대해, 어떤 분들은 이 영화가 범죄를 낭만화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보다 이 대사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의미 있게 해석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허기를 찌른다고 읽었습니다.
진짜 유물은 선릉 땅속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영화 후반부의 선릉 도굴 시퀀스는 제가 직접 보면서도 꽤 놀라웠습니다. 서울 강남 한복판, CCTV와 경비 인력이 가득한 조선왕릉에서 땅을 판다는 설정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영화는 그 말이 안 되는 상황을 완벽하게 납득시킵니다. 이건 연출의 힘입니다.
조선왕릉(UNESCO 세계문화유산)은 실제로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재입니다. 선릉은 성종과 중종의 능이 모여 있는 서울 강남구의 사적지로, 영화는 이 실존 장소를 배경으로 삼아 현실감을 끌어올립니다. 출처: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에 따르면 선릉 일대는 연간 수십만 명이 찾는 도심 속 문화유산 공간입니다.
그런데 영화의 조명이 꺼지고 나서, 저는 선릉 땅속 유물보다 다른 것에 더 오래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도굴꾼들이 목숨 걸고 파낸 것은 조선시대 보물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각자가 오래 묻어둔 자존심이었습니다. 실력이 있어도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 화려해 보이지만 속이 빈 사람, 말없이 제 몫을 다하는 사람. 이 세 캐릭터는 결국 자신이 가진 진짜 가치를 꺼내는 순간 완성됩니다.
30대 후반이 되면 현실과 타협하는 게 익숙해집니다. 제 경험상 이 시기에 가장 위험한 건 타협 자체가 아니라, 타협을 반복하다 내가 원래 무엇을 원했는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입니다. 지금 파고 있는 이 땅 밑에, 당신이 진짜 찾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도굴"이라는 행위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그 단어를 조금 다르게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것을 꺼내는 행위.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도굴 영화, 가볍게 볼 수 있나요 아니면 진지하게 봐야 하나요?
A. 케이퍼 무비 특성상 기본적으로는 가볍고 경쾌하게 즐기면 됩니다. 다만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웃고 나서 뭔가 남는 영화라는 점입니다. 진지하게 볼 필요는 없지만, 영화가 끝난 후 잠깐 여운을 즐기면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Q. 이제훈, 조우진 연기 어떤가요? 두 사람 케미가 실제로 살아있나요?
A. 이 부분에 대해 기대치가 높으면 실망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조우진의 허당 연기가 예상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이제훈은 능청스러운 캐릭터를 안정감 있게 끌고 가고, 두 사람의 티격태격이 영화의 리듬을 만듭니다.
Q. 선릉이 영화에 실제로 등장하나요?
A. 영화의 클라이맥스 배경으로 선릉이 직접 등장합니다. 실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을 도굴 타깃으로 삼은 설정이라 현실감이 상당합니다. 서울 강남 한복판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극 중 긴장감을 배가시킵니다.
Q. 영화가 문화재 도굴을 미화하는 거 아닌가요?
A. 범죄를 낭만화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읽었습니다. 영화는 도굴 행위 자체를 정당화하기보다, 문화재를 사적 욕심으로 독점하려는 추악한 권력에 맞서는 구도를 만듭니다. 도굴꾼들이 오히려 문화유산을 지키는 아이러니가 영화의 핵심 재미입니다.
결론
<도굴>은 케이퍼 무비라는 장르의 쾌감을 한국적 소재로 잘 버무린 영화입니다. 코미디와 범죄 오락극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보는 내내 지루한 구간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30대 후반의 눈으로 이 영화를 다시 읽었을 때, 단순한 오락 이상의 질문이 남았습니다. 지금 내가 땅을 파고 있다면, 그 땅 밑에 뭘 묻어뒀는지 기억하고 있는가.
가볍게 한 편 웃고 싶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선택입니다. 다만 30대 이상이라면 영화가 끝나고 나서 잠깐 여운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그 여운 속에서 꽤 솔직한 질문 하나와 마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