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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어쩔 수가 없다> (미장센, 블랙코미디, 고용불안)

by 오니픽 2026. 5. 26.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공감한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극장 불이 켜지는 동안 그 질문을 계속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25년 경력의 엔지니어가 해고 통보를 받은 뒤 구직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잔혹한 범죄극이지만, 보는 내내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저려오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미장센이 만들어낸 낯선 공포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먼저 압도당한 것은 배우도, 이야기도 아닌 공간이었습니다. 아파트 복도, 도심 빌딩의 회의실, 자판기 앞 좁은 복도. 우리가 매일 스쳐 지나는 그 장소들이 박찬욱 감독의 카메라를 통해 전혀 다른 무게를 갖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프랑스어로 '장면 안에 배치된 모든 것'을 뜻하는 영화 연출 용어입니다. 쉽게 말해 카메라 앵글, 조명, 소품, 배우의 위치까지 감독이 화면 안에 의도적으로 배열하는 모든 시각적 요소를 가리킵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미장센을 통해 평범한 사무 공간을 마치 거대한 사냥터처럼 시각화해 냅니다.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 형광등 깜빡이는 빛, 자판기 커피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음. 이것들이 기괴하게 증폭되면서 주인공 만수(이병헌 분)가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이시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데, 이런 연출 방식이 단순한 '분위기 조성'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감독은 일상 공간을 낯설게 만드는 방식, 즉 영화 이론에서 말하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을 의도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데페이즈망이란 익숙한 사물이나 공간을 맥락에서 분리시켜 불안감과 낯섦을 유발하는 초현실주의적 표현 기법입니다. 덕분에 관객은 영화 속 만수의 세계와 자신의 출근길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기묘한 감각을 경험하게 됩니다.

블랙코미디(black comedy)라는 장르적 틀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블랙코미디란 죽음, 폭력, 사회적 비극 같은 어두운 소재를 역설적으로 웃음의 도구로 활용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만수가 범행에 사용하는 도구들이 자신이 25년 동안 다루던 제지 회사의 자재들이라는 설정에서 저는 헛웃음이 나왔다가 곧바로 섬뜩해졌습니다. 이 아이러니야말로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가장 날카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연출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일상 공간을 사냥터로 변환하는 정밀한 미장센 설계
  • 평범한 소음을 심리적 공포로 전환하는 음향 연출
  • 제지 회사 자재를 범행 도구로 활용하는 블랙코미디적 아이러니
  • 살인마와 소시민 사이를 오가는 이병헌의 양가적 연기

30대 후반 가장이 느낀 고용불안의 현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저는 '설마 살인마에게 감정이입이 되겠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만수가 해고 통보를 받는 장면에서 어깨가 무너지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이 막혔습니다. 30대 후반,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의 시선으로 보면 이 영화는 스릴러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집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40대 중고령 구직자의 재취업 소요 기간은 평균 11.3개월에 달합니다(출처: 통계청). 이 숫자가 데이터로 보일 때와 영화 속 만수의 얼굴로 보일 때의 무게는 완전히 다릅니다. 만수는 통계 속 숫자가 아니라, 매달 날아오는 관리비 고지서와 아이들 학원비를 보며 밤을 새우는 우리 주변 누군가입니다.

영화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은 바로 구조적 실업(structural unemployment) 문제입니다. 구조적 실업이란 경기 침체가 아닌 산업 구조 변화나 기술 혁신으로 인해 특정 직무나 연령대의 노동자가 시장에서 밀려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만수가 아무리 성실하고 경험이 풍부해도 구직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는 것은 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 영화는 그 지점을 가장 아프게 건드립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무게로 다가옵니다. 회사에서 고과(인사 평가)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느끼는 그 묘한 긴장감, 보이지 않는 경쟁 속에서 적당히 웃으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감. 만수가 극단적인 방식으로 실행한 그 '경쟁자 제거'의 논리는 사실 우리가 매일 아침 출근하며 내면에서 조용히 작동시키는 생존 본능과 종류가 다를 뿐, 뿌리는 같다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45세 이상 중장년 실직자의 경우 재취업 후 임금이 이전 직장 대비 평균 30% 이상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노동연구원). 만수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일자리가 아닙니다. 25년의 커리어가 쌓아 올린 자존감과 가장으로서의 정체성이 함께 무너진 것이고, 영화는 그 붕괴 과정을 이병헌의 눈빛 하나로 설득력 있게 담아냅니다.

손예진이 연기하는 아내 미리의 존재도 묘하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단순히 남편을 보필하는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라, 가정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현대적 여성을 연기해 냈는데, 제가 직접 스크린을 보면서 느낀 건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지키려 하면서 동시에 서로에게 비밀을 쌓아가는 그 팽팽한 긴장감이 이 영화의 진짜 정서적 중심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어쩔 수가 없다>는 범죄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사회 고발극입니다. 박찬욱 감독이 던지는 질문은 단 하나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정도까지 어쩔 수가 없다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극장을 나서며 그 질문이 불편하게 남아 있다면, 그것이 이 영화가 제대로 작동했다는 증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별점 4.5점을 주고 싶습니다. 30대 후반이라면 특히, 혼자보다는 퇴근 후 동료와 함께 보고 영화가 끝난 뒤 맥주 한 잔 앞에 두고 이야기 나눠보시기를 권합니다. 아마 그 대화가 생각보다 훨씬 깊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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