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근 후 지하철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맞은편에 앉은 중년 남성의 무표정한 얼굴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보일 때가 있겠구나 싶어 씁쓸해지는 순간이죠.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바로 그 얼굴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병헌과 손예진 주연, 25년 직장 생활 끝에 해고된 한 가장이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들을 직접 제거해 나가는 블랙코미디 스릴러입니다. 처음엔 그저 자극적인 설정이라 생각했는데, 영화관을 나서면서 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시스템이 만든 괴물, 만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영화를 단순히 살인마의 이야기로 읽으면 절반밖에 못 본 겁니다. 박찬욱 감독이 설계한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를 들여다보면, 진짜 공포의 실체가 만수 개인이 아닌 그를 둘러싼 고용 시스템 자체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서사 구조란 이야기가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하는지에 관한 개념으로,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관객이 살인자에게 감정 이입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만수가 해고되는 시점부터 저는 묘하게 불편했습니다. 제가 직접 그 상황에 놓인 건 아니지만, 30대 후반으로서 "언제든 이 자리가 없어질 수 있다"는 감각은 결코 낯설지 않거든요.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40대 이상 장기 실업자 비율은 전체 실업자 중 약 30% 이상을 꾸준히 차지하고 있습니다(출처: 통계청). 숫자만 보면 차갑지만, 영화 속 만수를 보고 나서 이 수치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저 30% 중 한 명이 만수이고, 또 만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저일 수도 있다는 것.
이병헌의 연기는 이 불편함을 최대치로 끌어올립니다. 그가 보여주는 건 단순한 악인의 광기가 아니라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입니다. 인지 부조화란 자신의 행동과 가치관이 충돌할 때 겪는 심리적 갈등상태를 의미합니다. 만수는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그 표정의 밀도가 대사 한 마디 없이도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제가 직접 그 장면을 보면서 느낀 건, 섬뜩함보다 먼저 오는 아득한 공감이었습니다.
영화의 블랙코미디적 요소도 이 공감 구조를 강화합니다. 평범한 사무용품이 살인 도구로 등장하는 장면은 헛웃음을 유발하지만, 웃고 나서 바로 그 웃음이 부끄러워집니다.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들이 현대 직장의 익숙한 풍경과 폭력의 이미지를 겹쳐 놓으면서,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사무실이라는 공간 자체를 전장으로 재정의합니다.
이 영화가 불편하게 만드는 진짜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살인자를 욕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경제적 맥락
- 관객이 직접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게 되는 서사 설계
- 블랙코미디 특유의 웃음이 자기반성으로 전환되는 구조
손예진의 존재가 이 영화에서 하는 일
손예진이 연기하는 미리는 처음 보면 전형적인 내조형 아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캐릭터가 영화의 가장 잔인한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미리는 남편의 고통을 지켜보며 묵묵히 가정을 지키는데, 그 존재 자체가 만수의 살인에 명분을 부여합니다. 이게 바로 영화의 도덕적 딜레마(moral dilemma)의 핵심입니다. 도덕적 딜레마란 어떤 선택을 해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상황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손예진은 대사보다 눈빛과 침묵으로 이 딜레마를 표현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출연 전부터 두 배우의 조합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실제 스크린에서 만난 두 사람의 앙상블은 그 기대를 훨씬 넘겼습니다. 이병헌이 점점 무너져 가는 남자를 연기할수록, 손예진의 단단함은 오히려 그 붕괴를 더 극명하게 드러내는 배경이 됩니다. 두 캐릭터가 서로의 연기를 증폭시키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이라는 역할에 부여되는 심리적 압박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중장년 남성의 정체성은 직업과 소득에 과도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이는 실직 시 심각한 자존감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출처: 한국노동연구원). 영화 속 만수의 붕괴 과정은 이 연구 결과를 시각화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정교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단순한 픽션의 과장이 아니라, 주변에서 직간접적으로 목격해 온 현실과 상당히 맞닿아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묻는 건 단순합니다. "당신이라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질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선뜻 "예스"라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불편하고, 동시에 가장 정직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이 영화를 볼 이유입니다. 삶의 무게가 특히 무겁게 느껴지는 날, 만수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권합니다. 영화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 가족의 얼굴을 마주할 때, 아마 오늘 하루를 버텨온 스스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