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준호 감독이 "최근 10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라고 극찬한 영화가 있습니다. 2023년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유재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 <잠>입니다. 극장을 나선 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옆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유독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날 밤 저는 꽤 오래 천장을 바라봤습니다.
평범한 아파트가 지옥이 되기까지
영화 <잠>의 배경은 특별할 것 없는 신혼부부의 아파트입니다. 단역 배우 현수(이선균 분)와 대기업에 다니는 만삭의 아내 수진(정유미 분)이 사는 곳이죠. 거실에는 "둘이서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는 가훈까지 걸어둔, 흠잡을 데 없이 다정한 부부입니다.
이 안온함이 무너지는 건 한 마디에서 시작됩니다. 어느 날 밤 잠결에 깨어난 현수가 멍한 눈으로 "누가 들어왔다"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리고 다시 쓰러져 잠듭니다. 그날 이후 현수는 수면 중 행동 장애(RBD) 증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RBD란 렘수면(REM sleep) 단계에서 정상적으로 억제되어야 할 신체 움직임이 활성화되는 수면 장애로, 환자가 잠든 채로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수면 중 피가 날 정도로 뺨을 긁고, 냉장고에서 날생선을 꺼내 먹는 현수의 행동이 바로 이 범주에 해당합니다.
영화는 서사를 깔끔하게 1장, 2장, 3장으로 나눕니다. 각 장이 전환될 때마다 아파트 인테리어가 조금씩 바뀌는 방식으로 내부 붕괴를 시각화합니다. 문에 자물쇠가 늘어나고, 부엌칼이 안방 깊숙이 숨겨집니다. 저는 이 미장센(mise-en-scène)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 즉 소품, 조명, 공간 구성을 통해 인물의 내면이나 서사의 변화를 전달하는 영화적 기법입니다. 유재선 감독은 대사 한 줄 없이 가구 배치만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아파트가 공포의 배경이 아니라 공포 그 자체라는 감각이었습니다.
두 배우가 만들어낸 양면성의 서늘함
이 영화에서 제가 오랫동안 잊지 못할 장면이 있습니다. 이선균이 한밤중에 냉장고 앞에 서서 날생선을 씹어 먹는 장면입니다. 깨어 있을 때의 다정한 남편과 같은 얼굴로, 무표정하게, 기계적으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CG나 분장이 아니라 순전히 이선균의 신체 언어와 눈빛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요.
정유미의 연기는 또 다른 방향에서 소름 끼칩니다. 초반의 단단하고 이성적인 수진이 수면 박탈(sleep deprivation)이 심화되면서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이 압도적입니다. 수면 박탈이란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해 인지 기능, 감정 조절 능력, 판단력이 저하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수진이 겪는 광기는 단순한 공포 캐릭터의 변화가 아니라, 수면 부족이 인간을 어떻게 바꿔놓는지에 대한 거의 임상적인 묘사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수면 부족이 누적되면 환각이나 편집증적 사고가 유발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출처: 대한수면학회).
그리고 영화의 3장에서는 판이 완전히 바뀝니다. 현대 의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이, 무속 신앙과 오컬트(occult)의 영역이 끼어듭니다. 오컬트란 초자연적 현상이나 신비주의적 믿음 체계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영화에서는 현수의 증상이 죽은 아랫집 노인의 빙의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여기서 영화는 영리하게도 끝까지 어느 쪽이 맞다고 단정 짓지 않습니다. 의학적 설명과 초자연적 설명 사이에서 관객을 끝까지 흔들어 놓는 이 모호함이야말로 <잠>이 가진 가장 날카로운 무기입니다.
정유미는 이 역할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제 경험상 시상식 결과가 영화의 질을 보장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는 완벽하게 납득이 가는 수상이었습니다.
30대 남자로서 이 영화가 불편했던 이유
공포 영화를 꽤 많이 봐왔지만, <잠>처럼 집에 돌아온 뒤에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 영화는 드물었습니다. 그 이유를 곱씹어보니, 이 영화가 건드리는 공포가 귀신이나 괴물이 아니라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30대 후반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깁니다. 질병이 될 수도 있고, 경제적 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족이니까 함께 버텨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버팁니다. 그런데 만약 그 버텨야 할 이유가 동시에 나를 무너뜨리는 원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수는 악인이 아닙니다. 깨어 있을 때는 자책하며 눈물 흘리는 남편입니다. 그렇기에 수진은 떠날 수도, 버릴 수도 없습니다. "함께"라는 그 가훈이 오히려 족쇄가 되는 아이러니, 이 지점이 제게는 가장 불편하고 또 가장 진실되게 느껴졌습니다.
<잠>을 관람할 때 주목할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2·3장 전환마다 달라지는 아파트 인테리어와 소품 변화
- 이선균의 수면 중 행동과 깨어 있을 때의 태도 차이
- 엔딩 직전 현수의 행동이 연기인지 실제 빙의의 결과인지
- 수진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방법과 그 의미
현수가 자신을 침대에 묶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과, 칼을 쥔 채 충혈된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수진의 뒷모습에서 저는 우리 시대 젊은 부부들의 피폐한 초상을 봤습니다. 한국 성인의 수면 장애 유병률은 약 20%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출처: 국민건강보험공단). 그 수치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이 영화 속 두 사람의 이야기와 겹쳐 보이는 순간, <잠>은 장르 영화를 넘어서 현실 이야기가 됩니다.
<잠>은 94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군더더기 없이 밀도 높게 구성된 영화입니다. 점프 스케어(jump scare), 즉 갑작스러운 시각·청각 자극으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 연출 기법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만큼의 서스펜스를 설계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성취입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뒤 같이 본 사람과 그 결말을 두고 논쟁을 벌이게 된다면, 그것이 이 영화가 노린 정확한 목표에 당신이 도달한 것입니다. 오늘 밤 배우자 혹은 가까운 사람과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보고 나서 할 이야기가 적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