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28 한국영화 <화란> 리뷰 (누아르, 부채감, 연기) 18세 소년이 몇백만 원짜리 합의금을 마련하지 못해 조직 폭력의 세계로 걸어 들어갑니다. 영화 화란이 던지는 첫 번째 충격은 바로 이 단순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극장 불이 켜진 뒤에도 자리에서 한참 일어나지 못했습니다.한국 누아르의 공식을 의심하게 만든 영화일반적으로 한국 누아르 장르물이라고 하면 칼부림과 권력 결탁, 숨 막히는 반전 플롯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솔직히 그런 선입견을 안고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화란은 그 공식을 처음부터 거부합니다.누아르(Noir)란 프랑스어로 '검다'는 뜻으로, 영화 장르로서는 도덕적 모호성과 운명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물의 심리적 붕괴를 중심에 두는 스타일을 가리킵니다. 화란은 이 장르적 정의에 가장 충실한 영화 중 하나입니다. 화려한 외부 사건 .. 2026. 6. 2. 한국영화 <대가족> 리뷰 (부자관계, 가족영화, 김윤석) 솔직히 말하면 극장 문을 나서면서 눈물을 닦는 저 자신이 조금 민망했습니다. 영화 대가족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곳을 건드렸습니다. 30대 후반 남자가, 아이를 키우며 매달 고지서와 씨름하는 제가, 스크린 속 무뚝뚝한 아버지 함무옥을 보며 왜 그렇게 목이 메었는지 — 이 글에서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종로 노포(老鋪)와 사찰이 충돌하는 서사, 그 설계의 힘영화의 무대는 서울 종로에서 30년을 버텨온 이북식 만두 전문점 '평만옥'입니다. 주인 함무옥(김윤석 분)은 평생 만두만 빚어온 장인이지만, 하나뿐인 아들 함문석(이승기 분)은 속세를 등지고 주지 스님이 되었습니다. 부자(父子)는 수년째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내던 중, 느닷없이 어린 남매가 평만옥에 나타나 "우리가 스님 아들딸"이라고 선언.. 2026. 5. 31. 한국영화 <어쩔 수가 없다> (미장센, 블랙코미디, 고용불안)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공감한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극장 불이 켜지는 동안 그 질문을 계속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는 25년 경력의 엔지니어가 해고 통보를 받은 뒤 구직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잔혹한 범죄극이지만, 보는 내내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저려오는 이유가 있었습니다.박찬욱 감독의 미장센이 만들어낸 낯선 공포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먼저 압도당한 것은 배우도, 이야기도 아닌 공간이었습니다. 아파트 복도, 도심 빌딩의 회의실, 자판기 앞 좁은 복도. 우리가 매일 스쳐 지나는 그 장소들이 박찬욱 감독의 카메라를 통해 전혀 다른 무게를 갖기 시작합니다.여기서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프랑스어로 '장면 안에 배치된 모든.. 2026. 5. 26. 한국영화 <달짝지근해> 리뷰 (로맨틱코미디, 유해진, 힐링영화)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쓰러지면서 "오늘도 잘 살았다"는 생각보다 "내일도 버텨야지"가 먼저 떠오른다면, 그 마음 저는 정확히 압니다. 3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영화 한 편 고를 때도 자극적인 것보다 그냥 조용히 웃을 수 있는 걸 찾게 됐습니다. 그 마음으로 고른 영화가 이한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달짝지근해: 7510이었습니다.뻔하다고 무시했다가 제대로 당한 영화의 배경솔직히 처음에는 큰 기대 없이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로맨틱 코미디(Romantic Comedy), 줄여서 로코라고 불리는 이 장르는 국내 영화 시장에서 흥행 공식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여기서 로코란 주인공 남녀가 우연히 만나 갈등을 겪다가 결국 사랑을 확인하는 서사 구조를 기반으로 한 장르를 의미합니다. 이 구.. 2026. 5. 25. 한국영화 <가시> 리뷰 (일상 무감각, 집착 심리, 현실 자각) 영화 한 편이 30대 후반 남자의 가슴을 이렇게 오래 짓누를 줄 몰랐습니다. 조보아가 연기한 소녀의 절규는 끝나고도 귓속에 맴돌았고, 저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준기가 아니라 제 자신을 떠올렸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마음 한구석이 비어간다고 느끼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꽤 불편한 질문을 던질 겁니다.반복되는 일상이 만들어낸 빈틈, 그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영화 속 준기는 전직 국가대표 체육 선수 출신입니다. 뜨거웠던 경쟁과 긴장이 사라진 자리에 안정적인 교직과 단정한 결혼 생활이 들어섰지만, 그 안정감이 오히려 그를 갉아먹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 상태를 '아노미(anomie)'라고 부릅니다. 아노미란 개인이 사회적 목표와 현실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며 의미 상실과 무기력을 경험하는 심리 상태를 의미합.. 2026. 5. 25. 한국영화 <히든페이스> (관음증, 밀폐공간, 욕망의 민낯)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불편함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단순히 자극적인 장면 때문이 아니라, 화면 속 성진의 행동이 어딘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30대 후반 남자의 눈으로 본 히든페이스는 에로틱 스릴러라는 장르 너머에서 꽤 묵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관음증이라는 장치,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역전제가 직접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개념이 바로 관음증(voyeurism)이었습니다. 관음증이란 타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대상을 몰래 지켜보는 것에서 심리적 만족을 얻는 성향으로, 정신의학에서는 관음장애(Voyeuristic Disorder)로 분류됩니다. 영화는 이 개념을 단순한 자극 소재가 아니라 서사의 핵심 구조로 활용합니.. 2026. 5. 13. 이전 1 2 3 4 5 다음